♠예쁜글... 좋은글...

김춘수 강우

초 이 2020. 10. 5. 13:07

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
어디로 갔나.
밥상을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.
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
코를 맵싸하게 하는데
어디로 갔나.
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.
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.
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.
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. 아니 아니
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.
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.
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.
나는 풀이 죽는다.
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.
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.
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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팔순의 노시인이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아내에게 바친
시집 '거울 속의 천사'에 실린 시입니다.

'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'라는 반전이 없었으면 시적 긴장감이 부족할
번 하였지만,

아직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상 속에서 '나는 풀이 죽는다'는 현실인식과 '지금은 어쩔 수 없다'는 단념에 이르기까지의 아내사랑이 눈물겹습니다.

'지금은 어쩔 수 없음'을 느닷없이 퍼붓는 강우 탓으로 돌리는 솜씨도 한 수 배워 둘 일입니다.